억울함을 벗어나는 세 가지 방법




세상 억울한 무인성


세상에는 억울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무인성 사주팔자들도 억울하다.


억울한 마음이 드는 무인성 사주

선한 의도로 상대방에게 잘해주지만

결과가 좋게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해주고 욕을 먹는 무인성


이런 일이 있었다.


누가 지갑을 갖고 싶다고 말해서 쇼핑센터에서 구입을 했다.

센스가 없는 무인성 수니는 지갑에 현금을 넣는 것을 몰랐다.

선물을 받은 상대방은 현금이 없다고 투덜거린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은 지갑과 현금이었지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분명 선물을 해주었으니

흐뭇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찜찜함과 불쾌감이 남는다.

그래서 억울함이 생긴다.


이런 일들이 쌓이면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해주고 욕을 먹는구나.



인성이 부족하니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그러다 보니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억울함의 씨앗은 내가 뿌렸다는 것이다.

다각도로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성급하게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하다 보니 억울한 상황,

결국 해주고 욕먹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무인성을 위한 세 가지 개운법





이런 괴로운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인성을 위한 개운법을 여기저기 검색해봤다.


그리고 내 삶에 적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세 가지를 정리해본다.




3초 기다린 후에 대답하기


예전에 읽은 「사소한 차이」 책에 나오는 방법이다.


하나, 둘, 셋

1초, 2초, 3초


3초를 기다린 후에 대답을 하는 것이다.


무인성들은 깊게 생각하는

힘이 부족하다 보니

성급하게 결정하거나

말을 하는 바람에

손해 보는 일이 무지하게 많다.



이 사소한 법칙을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면

많은 문제들이 해소될 거라고 장담한다.


이 사소한 법칙을 까먹어도 괜찮다.

잘 못해도 괜찮다.

그게 정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실천해보자.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언젠가는 익숙하게 자리 잡을 것이다.




나에게 돈 쓰기 시작하기


인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고 챙겨주는 기운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이다.


즉, 따스한 도움에 손길이 별로 없다.


또한 무인성들은 누구한테 도움을 받는 것을 굉장히 불편해한다.

그래서 챙겨줘도 거절하기 일쑤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보호하는 기운은 부족하고 남에게만 신경을 쓰다 보니,

어느 날 자신을 돌아보면 억울한 마음이 든다.



누구보다도 무인성은 자기를 직접 챙겨야 하는 사람.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사랑을 줘야 하는 사람.

누구보다도 자신을 아껴야 하는 사람.

누구보다도 자신을 보살펴야 하는 사람이 바로 무인성이다.



그래서 남에게 쓰는 돈을 줄이고 자신에게 돈을 써야 한다.


자기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커피와 차도 사주고,

이쁜 옷도 사주고,

책도 사주고,

장식품도 사주고,

선물도 사주어야 한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대접하고 보살펴야 하는 사람이

무인성 사주팔자이다.



최근에 아티스트 데이트를 시작했다.



아티스트 데이트는

내 안에 잠재된 아티스트를 만나는 시간이다.



「아티스트 웨이」 책에 작가(줄리아 카메론)가

추천하는 창조성을 개발하는 방법이다.


아티스트 데이트를 하면서

매주 50불씩 나를 위해서 작은 사치를 시작했다.


그전에는 아까워서 나를 위해 돈을 쓰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선물을 잘도 하면서 말이다.


아티스트 데이트를 하기 위해 나만을 위한 시간을 내었다.

그리고 좋은 곳에서 경치 구경을 하면서 맛있는 것을 사 먹었다.

또 나를 위한 작은 선물들도 샀다.


매주 50불이라는 한도를 꼭 넘겨서 사용하도록 했다.


그러자 내 마음에 기쁨이 찾아왔다.

눈물이 흘렀다.


왜 여태 이렇게 나를 챙기지 못했는가 하는 아쉬움과

지금이라도 이렇게 나를 사랑하게 되어 감사하다는 기쁨에 눈물이었다.


무인성이라면 아티스트 데이트를 꼭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매주 50불, 5만 원을 정해서

자신을 왕자 공주처럼 대접하라.




나를 위한 글쓰기 시작하기


무인성 사주라면 식신 상관이 발달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수다를 떠는 것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나중에는 공허함이 남았다.


무인성 개운법으로 일기 쓰기, 글쓰기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적용을 해봤다.


글을 쓰면서 내가 나에게 수다를 떨었다.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예전에는 타인에게 수다를 떨면서

나의 에너지와 타인의 에너지를 소모했다.


하지만 이젠 내가 나에게 수다를 떠니 에너지가 낭비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시간을 내서 들어달라고 하소연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 된다.

그리고 나와의 대화를 글로 적는다.


그리고 내 컴퓨터에 저장하거나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내가 그때 무슨 수다를 떨었는지 언제든지 볼 수 있다.


그리고 관심 있는 누군가도 나중에 읽어볼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 안에 부처가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 안에 하나님이 있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그래 지금 나는 나에게 이야기를 하지만,

내 안에 있는 부처님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내 안에 있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닐까?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보니

이것은 차원이 다른 수다이다.


내가 나에게 하는 수다는

알고 보니 부처님과의 대화이고

하나님과의 대화인 거다.


왜 여태 다른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수다를 떨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그것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소모했다.



이젠 나는 부처님과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나 혼자 속으로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게 부처와의 대화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대화인 것이다.



그것을 정리하여 글로 적으면

부처님과의 대화록,

하나님과의 대화록이다.


차 한잔 마시면서

내 안에 부처님에게 말을 걸어보자.

하나님에게 말을 걸어보자.


대답을 안 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실망하지 말고

나와의 대화를 계속 시도해보자.



너는 요새 무슨 생각 하니?

넌 요새 어떻게 지내니?

넌 요새 마음은 어떻니?

넌 요새 뭐가 필요하니?

넌 요새 뭐가 하고 싶니?

넌 요새 뭐가 싫으니?

넌 요새 뭐가 불편하니?

넌 요새 뭐가 짜증 나고 화가 나니?

넌 요새 뭐에 집착하니?

넌 요새 뭐에 관심 있니?

넌 요새 건강은 어떻니?

넌 요새 하늘을 쳐다보니?

넌 요새 산책길에 나무를 보니?

넌 요새 창밖을 보니?


또 물어보자.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니?


이렇게 계속 나랑 수다를 떠는 거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의외로

내가 나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남에게는 이런저런 안부를 물어보지만

정작 나한테는 그런 걸 물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에게 안부를 물어보지 않았던 과거는,

나를 방치했던 시절이다.



내가 내 안에 부처님에게 안부 인사를 묻지 않은 것과 같다.

내 안에 하나님에게 안부 인사를 묻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도 하나님도 내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거다.


예전에는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이야기가 전혀 와닿지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나랑 대화를 조금씩 하다 보니,

이런 것이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 지인들과 수다를 떠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면의 나와 수다를 떠는 것,

이것이 바로 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의 대화를 글로 적으면 바로 대화록이 되는 것이다.


그 대화록을 글로 적어서 남기면 그게 바로 글쓰기이다.


요새 내가 살짝 놀라는 것은 내 안에 뭔가가 있다는 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이런 대화를 하려고 글을 적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다른 대화를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대화의 방향이 바뀌거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잠시 부처님이나 하나님이 내 대화에 끼어들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요새는 나와의 대화를 적는 것이


나에게 특별한 즐거움이 되고 있다.


무인성 개운법 글쓰기는


나에게 주어진 선물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